DATABASING the IMAGE = 기술 or 기법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5-1498)」은 그것이 그려지기 이전부터 위대한 예술이었던 듯, 천재가 그린 걸작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그려진 수많은 최후의 만찬 중,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회자 되고 칭송받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다수의 미술 관련 종사자들은 그림에 사용된 <투시도법>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가 창안하고, 그 후 많은 화가의 그림에서 사용된 투시도법(선원근법 : linear perspective)이,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화려하게 꽃피었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여 줍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 photo by. Carlo Ferraro

브루넬레스키의 선원근법 : 관련 영상


뭔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어른들 사이로 한 아이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 꽃은 무슨 색인가요? 향기는 어떤가요? 그 향기에 어떤 벌과 나비가 날아들었나요? 그리고…?”



Perspective

<투시도법>이 회화의 역사에 기여한 수많은 이야기가 아이를 즐겁게 해주겠지만, 아이의 궁금증을 모두 채워줄 수는 없을 겁니다. 돌아오는 다양한 답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답을 추구하며, 때로는 다양한 답이 주는 혼란스러움을 즐기며, 아이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받고 세상의 질문에 대답하며 어른이 되어갑니다. 질문이 지루해지고, 당장 해답에 목말라 지면, 지금의 분명함을 위해 다양한 요소를 제거하는 편리함에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규정되어 명확한 것 못지않게,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 속에서 모호하지만 밝게 빛나 선명한 것 또한 경험하게 될 겁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자신의 손과 발을 구분하는 것은 명석함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요소들의 다양한 결과들은 상호 대면하며 빛을 더해 갑니다. 빛은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기도 하지만 자신 아닌 무언가를 밝혀 주기도 합니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투시도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듯 르네상스 시기의 <투시도법>은 다 빈치를 포함한 화가들에게 빛이 되어 한 걸음 나아가는 힘이 되었을 겁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며 밝게 빛난다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빛을 발하며 걸작으로 칭송받은 예술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화려하게 발하던 빛이, 어느덧 힘을 잃고 그 당시 유행하던 것들 중 하나가 되어 기억에서 잊혀지기도 합니다. 때론 기술적 성과가 예술과 흡사한 색깔의 빛을 내거나 더 밝게 빛나 예술을 규정하던 기존의 사고에 균열을 만들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기술과 예술을 수직선상에 놓고 그들을 순서 지어 구분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기술은 잠시이고 예술은 영원히 빛난다 할지 모르지만, 수직을 기울여 수평선에서 둘을 바라보면, 혹은 나의 얼굴을 수직으로 기울이면,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빛을 내며, 때론 기술이, 때론 예술이 서로 밝혀주고 영감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간혹 사람들의 선호로 인해 특정한 기술이 예술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기술이나 예술의 빛이라기보다 경제의 빛에 가깝습니다.




DATABASING the IMAGE

<기술과 예술> 혹은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이들과 그것을 허물려는 이들의 논쟁은, 화두를 달리하며 오래도록 지속 될 겁니다. 그러한 논쟁 중 보편성을 획득한 것들이 상식으로 자리 잡고 그러한 상식을, 학술적 성과에 근거한 단어들로 규정해 사전辭典(말씀사:법전, dictionary)에 기재합니다. 사전적 정의로 <투시도법>은 예술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법技法(재주기:법법, technique) 중 하나로 분류됩니다. 좀 더 명확히 구분하자면, <투시도법>은 <기술적 성취>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투시도법>처럼, 현대의 <디지털>이라는 기술적 성취는 지금도 새로운 만찬들로 자신을 살찌우고 있습니다.
다음은 현대의 기술적 성취 중 하나인 <디지털>을 이용한 <DATABASING the IMAGE>가 즐기는 「그날그날의 만찬The ordinary Suppe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그린다 = 코드를 저장한다  

Picture → DATABASING the IMAGE



DATABASING the IMAGE(이하 DB the IMG)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그림 그리기입니다. 따라서 DB the IMG에서 그리는 행위는 즉시 데이터data로 저장되며, 동시에 모니터로 출력되어 지금 그리고 있는 상황을 이미지로 확인시켜 줍니다.
다음은 DB the IMG로 「1943, Denver bronze Lincoln cent(이하 링컨동전)」를 제작하는 과정입니다.


  1. Web에서 ‘1943 Lincoln cent’를 검색
  2. 수집된 이미지 중 하나를 선택
  3. 선택된 이미지를 원본 삼아, 컴퓨터 프로그램Adobe Illustrator을 이용한 <링컨동전> 그리기




저장된 코드를 출력   

DATABASING the IMAGE → Picture or Text



코드를 모니터에 이미지로 출력

Digital Code로 저장된 그림의 Data(정보)들은 저장매체(hard disk 등)라는 물체에 담기지만, 정보 자체는 ‘Code’로 실재(reality)하는 것이지, 흐르는 음악처럼 ‘실체(substance)’로 손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코드化 된 그림’을 보고 만지기 위해선 디지털 신호를 ‘캔버스(모니터) 위에 그림’이라는 사물로 전환(converting)하는 아날로그化 과정이 필요합니다.
Drawing & Coding 이야기



또는, 도화지에 그림으로 출력

DB the IMG 형식으로 그려진 <링컨동전>은 크기와 재료를 달리하며 다양한 그림(제품)으로 생산될 수 있습니다.
제품 이미지



또는, 책Code Book으로 인쇄

Digital Code로 컴퓨터에 저장된 <링컨동전>은, 그 Code를 Text 형식으로 추출 후, 종이에 출력해 엮으면, 디지털 저장장치에서 벗어나 책으로 보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Code Book 이야기




코드북의 텍스트를 컴퓨터에 입력   

Text → Code′ (DATABASING the CODE)



Code Book의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


컴퓨터는 0과 1의 두 숫자(2진수 : binary number)를 기본으로 연산을 수행합니다. 즉 Digital로 구현되는 모든 것은 0과 1의 조합code 입니다. 그렇게 조합된 파일 문서, 그림, 영화, 음악...의 0과 1을 Text 형식으로 추출해 책으로 만들거나 노트에 옮겨 적어 보관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노트의 내용을 순서대로 컴퓨터에 입력하면 처음과 동일한 파일 문서′, 그림′, 영화′, 음악′...을 얻게 됩니다.


Code를 눈으로 본다는 것  ·   Picture ; Code ; Text



노트에 옮겨 적은 Code를 컴퓨터에 입력




입력된 코드를 출력   ′ →

Code′ → Picture′ or Text′

책과 노트로 옮겨진 Text는 더이상 그것을 컴퓨터가 Code로 인식하지 않기에 Code가 아닌 문자와 숫자로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컴퓨터에 차례대로 입력하면 다시 원래의 파일로 변환됩니다.




코드′를 모니터에 이미지′로 출력



또는, 도화지에 그림′로 출력



또는, 책′으로 인쇄




르네상스 시기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활용된 <투시도>처럼, 위에 제시된 일련의 과정은 <기술≒기법>입니다. 이러한 기술들 중 몇몇은 예술로 용인되고 몇몇은 기술로 남습니다. 이 말은 한 개인이 예술을 직업으로 삼고 그가 구사하는 기법이 뛰어나다 해서, 그의 생산물이 모두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기술≒기법>임이 분명한 <DATABASING the IMAGE>를 조금 더 발전시키면, 위의 과정(Code를 노트에 옮겨 적는 과정을 제외)을 수행하는 프로그램 <가칭 : DB-IMG>를 만들 수 있으며, <DB-IMG>를 이용하면 누구나 몇 번의 클릭만으로 위와 같은 결과물의 생산자가 됩니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위의 과정들이 예술로 인정받고 ; <DB-IMG> 또한 예술로 인정받는다면 ; <DB-IMG>를 이용해 얻은 결과들을 모두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토론 해봄 직한 이야기지만, 이 질문에는 토론을 빙자한 강요, 즉 ‘이 정도 기술이면(말의 기술을 포함) 예술이다.’라는 독선을 슬며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논할 때 ‘만약’이라는 단어의 활용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고 대화의 시간을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그 가정이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개인 또는 단체를 넘어 다른 이에게 그 집중을 강요할 권한은 그들에게 주어진 바 없습니다. 가정을 만들어 내는 이들의 자유로움 만큼이나 그것을 구경하는 이들의 사고 또한 방해받지 말아야 합니다. 기술의 성과를 확인하는데 머물고, 그것의 새로움, 정교함, 치밀함 등을 알리는데 매진하는 것은 예술 활동이라기보다 산업 활동에 가깝습니다. 더욱이 예술이 취하거나 응용하려는 기술의 수준은 산업이 보기에 매우 유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한국의 현대 미술은 예술이라는 호칭을 면죄부 삼아 이러한 유아적인 놀이를 지속하며, 보는 이들에게 아이의 시선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쉽게 싫증 내며 새로움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새로움보다 완성을 요구하는 한국의 미술이 원하는 것은 <시선>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한 예술에 대한 <동의>, 또는 <묵인>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예측하기 힘든 아이보다 말 잘 듣고 얌전한 아이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집단/사회/구조의 용인에 의해 성립됨이 분명해 보이며, 그것을 주도하는 소수의 치밀하고 조용한 강요는 용인에 의한 것을 그 이전부터 진리였던 것으로 혹은 예전보다 더 나은 새로운 진리로 나의 머리에 어느덧 각인됩니다. 하지만 예술로 용인되지 못한 다양한 <만약>들이 주는 혼란처럼, 그 용인의 경계면에 <기술적 성과>가 자리할 때 기존의 용인을 낯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기술적 성과>의 확인을 넘어, 예술이라는 기법적인 것의 차용을 통해, 기존 면의 가장자리에서 다른 면과의 대면이라는 긴장의 관계를 형성할 때, 예술에 차용된 기술은 용인을 기다리기보다 <용인됨> 또는 <용인될 수 없음>의 논란을 주도하게 됩니다. 논란이 모두 예술로 용인되지 않겠지만, 일련의 과정은 각자 고유한 깊이를 머금고, 또 다른 것의 양분이 됩니다.



보고자 하는 것을 정한 후 앞을 바라보는 것과, 눈에 들어오는 것들 중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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