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빛, 그리고 그것의 마름질


   시선 그리고 시각



센스sense를 중시한 모네. 그는 찬란한 햇살이 빚어내는 화려한 일루전illusion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조금씩 때로는 빠르게 변하는 빛의 리듬에 반응하며 흘러가는 일루전의 빛줄기들을 따라 모네의 시선이 흐른다. 흐르는 시선을 붙잡기라도 하려는듯, 그는 특정한 장소, 계절, 시간, 날씨를 선택해 캔버스에 담았다. 정지하지 않는 시간과 정형定型(a fixed form)되지 않는 일루전들, 그리고 그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극단적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시선의 재단 Point of View.


‘모네는 자신의 캔버스에 흐름을 담으려 집착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그림마저 흐름의 일부라 생각했는가?’

‘그는 흐르는 빛을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흐르는 빛이라는 소재에 반영한 것인가?’

‘모네의 그림을; 그를; 그가 살아간 시대를;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은, 지금 그의 그림을 보고 있는 나에게 반듯이 선행되어야 할 사항인가?’

...

‘그의 그림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그림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강요를 하고 있는가?’


Claude Monet 「The Rose Walk, Giverny」


모네의 장미 정원, 프랑스 지베르니



‘캔버스는 흐름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담을 수 없다.’



因果律

선행된 학습으로 습득된 지식은 자칫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항의 확인 과정으로 경험을 활용한다. 이는 모네가 그토록 넘어서려 했던 사실주의자들의 미학에 가까우며 빛줄기들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어 저마다의 빛을 발하는 일루전들과 교감하기 전, 모네의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으로, 자신의 시선을 사회와의 교감이라는 명목으로 포기하고 있음을 잊게 한다. 이는 소극적인 엘리트주의Elitism다. 모네에 대한 학습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나의 시선은 너무도 쉽게 나로부터 외면당한다.


<저건 뭐야?>라는 아이의 질문과 <그건 사과야>라고 답하는 부모의 명석明晳(밝을명:밝을석)함. 그리고 간혹 이어지는 <사과는 뭐야?>라는 되물음과 <저게 사과야>라는 간결簡潔(간략할간:깨끗할결)함.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러했으며 적절한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는 주장은 너무도 소박해, 나의 일상과 관련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소박함이 주는 편리함을 기반으로 명석하고 간결한 대화를 이어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절대자야훼(יהוה, Yahweh)의 말씀으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고 그것들에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듯, 인과율因果律(원인과 결과, Law of causality, Kausalgesetz)에 기반을 둔 서양 근대 과학의 성과는 오늘로 이어져, 실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합성하며 그것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의 근간인 인과율 또한 그의 계획하신 범위의 것이며, 아담Adam에게 짐승들의 이름 지을 권리를 허락하신 그의 자비로움의 한 형태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종교적 확신은, 모든 것이 그의 계획하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위대한 하나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 수많은 가설을 실험과 수학을 통해 증명하며 사고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은, 종교적 믿음이 보여주는 절대적 진리와 거리를 두며 이성의 지평을 넓혀 가지만, 그 일면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위대한 법칙(원리, 원인, …)을 찾으려는 열망은 집착으로 변질되어, 자신의 반대편 극단에 자리한 종교를 격려하며 서로의 논리를 공유한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법칙들을 아우르는 <위대한 하나>는 사고의 지평을 비약적으로 넓혀 주지만, 그로 인해 그동안 발견된 소소한 것들의 설 자리를 침범한다. 새로운 지평의 시작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은 그 위대한 법칙이 마련한 지평이, 경전에 기록된 율법이 아닌 또 하나의 발판이 되어 줄 때, 소소한 것들은 위대한 법칙이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을 살피며, 또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위대함으로 잊혀진 소소함들이 가치 없는 잡다함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닌, 그 잡다함이 다양함의 기반임을 상기할 때 법칙은 율법이 되어 나를 가두는 두꺼운 갑옷이 아닌, 휴대 간편한 도구가 되어 나에게 편리함을 선사한다.

인과율이 둘 모두에게서 환영받는 지금, 존재의 합리화를 위해 과학을 활용하는 종교와 실험과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은 서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한다.



視線· 視角

켜켜이 쌓여온 크고 작은 지식들이 다져놓은 위대한 대지 위를 내가 걷고 있음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걷는다는 건, 그 원리의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행함으로 자연히 익숙해진다. 한걸음 내딛기 전, 다수가 걸어간 발자국에 동조하며 자신의 발자국이 곧게 뻗은 큰 길Mainstream로 이어져야 한다는 집착은, 눈앞에 들어오는 크고 작은 길을 확인하고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멀리한 채, 나의 시선을 발 앞으로 한정하고 다수가 걸어간 발자국의 방향을 확인하며 안심을 얻는다.


걸음은 끊임없이 시점을 이동시키며, 매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함을 요구한다. 그것이 무의식적 행동이라도 판단하고 있음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동의로 일관되어 자신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희미해져 있을 때, 희미하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낯선 빛은 미묘한 혼란을 선사한다. 사적私的인 인식의 부재를 경험하며 무언가 깨달은 듯, 미묘한 혼란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며, 아래를 향하던 고개를 들고 <잊고 있던 자신의 시선을 인지하는 순간> 가공되고 종합되기 전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며 자연과 세상를 구별한다. 그러나 가장 큰 오류는 <세상과 교감하게 되었다>는 선언의 순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대부분이 행하게 되는 이러한 섣부른 판단과 다짐은 자신의 시선視線(볼시:줄선, 눈이 가는 방향, one's eyes, one's gaze)을 회복하기 보다, 자신의 시각視角(볼시:뿔각,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거나 파악하는 각도 또는 입장, perspective)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익숙했던 것이 낯설음으로 다가와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해도, 세상을 또 다른 계열로 구분 지어 바라보게 된 것일 뿐(사적인 세상이 펼쳐진 것일 뿐), 당장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며, 낯설음을 즐기는 자신의 시각에 모두가 동의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동의는 타인의 몫이며, 나에게 온전히 자유로운 것은 나의 시각을 밝히는 데 있다. 자신의 변화가(자신이 이해하는 세상이) 세계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으나 자신의 변화와 세계의 변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시각을 밝히는 데 필요한 설명, 하지만 설명은 설득과 강요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객관적 시각을 취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치밀하게 다듬어진 객관적 시각 또한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의 인지다.



消失點

시선과 달리 시각은 설득과 강요를 품게 된다. <잊고 있던 자신의 시선>이라는 문장 또한 특정한 시각이 지시하는 설득과 강요의 작용이며, 이것을 잊는 순간, 그 시선은 시각에 포섭된다. <캔버스는 흐름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담을 수는 없다.>는 문장 또한 모네의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학습의 일부이며, 설득과 강요의 다양한 버전 중 하나일 뿐이다.

자연이 나에게 주는 일루전과의 교감, 그리고 그것의 부재만큼이나 그림이; 글이; 사건이; 경험이; 나에게 전하는 일루전들과의 교감 또한, 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신념으로 거부된다. 보고자 하는 것을 정하고 두리번거리는 것은 시선이 아니라 시각이다. 시각은 이미 자신에게 온전히 포섭되어 있으며, 자신 또한 더 거대한 시각의 줄기에 포섭되어있기 마련이다.


한 점으로 모인 소실점消失點(사라질소:잃을실:점점)을 기준으로 그려진 건축물의 그림은 정교함을 선사하지만, 그로 인해 그 규칙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틀린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수많은 틀린 것들은 단지 편의를 위해 제거되었을 뿐, 그 정교한 그림 안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시점으로 그림을 재구성 할 수 있다. 이는 시점이란 구성 가능한 것이며, 소실점이란 시점의 빠른 판단을 위해 개발된 것일 뿐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케 한다.


포섭된 덩어리 안에서, 이 덩어리가, 내가 포함되어 있기에 형성 가능한 것임을 알리듯 나의 시선은 끊임없이 빛의 얼룩에 반응하며 시각에 공명한다.

공기의 진동을 소리로 전해주는 귀의 공명, 빛의 파장을 색으로 이어주는 눈의 공명, 시각과 시선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공명하며 막을 형성한다. 그 막은 세포의 그것처럼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교류한다.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흐름의 반영을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극단적인 마름질을 행했다. 캔버스는 흐름을 설명하는데 기여할 뿐, 그것을 담을 수는 없음을 반영하듯, 그는 연작을 통해 시간의; 빛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단된 나머지(공간; 시점; 캔버스…)들이 남는다. 이는 그의 한계를 증명한다기보다 그가 이곳까지 나아갔음을 이야기한다. 그가 안내한 길 위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것인지, 그의 시선 너머를 볼 것인지는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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