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윤) 3代, 19세



‘말’의 정지 상태가 ‘글’이라면, ‘글’의 운동 상태는 ‘읽기’인가, 그 후의 ‘사유’인가? 혹은 그 자체로 ‘운동’ 상태인가?



화석化石은 그곳에 머물렀던 생물체의 흔적이 남은 것일 뿐, 그 흔적을 남긴 주인의 물질적인 것들은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흔적을 토대로 많은 이들이 그 당시를 연구하고 학설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재해석합니다. 물리적으로 정지된 상태인 화석이 그곳에 머물렀던 이를 현재로 불러와 세상과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 자체로는 허상을 담고 있는 종이에 불과한 사진은 화석과 많은 부분을 공유합니다. 시간을 품고 정지된 것이며, 흔적만을 담고 있는 것이며, 일정하게 보관되는 것까지...
사진 찍는 순간 피사체의 시간이 사진 이미지로 재단되는 것처럼, 사진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 되는 순간 사진의 시간은 코드로 재단됩니다. 코드화된 디지털 이미지는 모니터나 종이에 출력되어 또 하나의 시간을 품게 됩니다. 유치한 돌림 노래 같지만 일련의 과정엔 동어반복同語反復(Tautology)이라 규정하기 모호한 각기 다른 노동력이 들어 있습니다. 물리적 형태는 변하지만Conversion 자신 이전의 원본을 닮기 위해, 혹은 차별화 하기 위해 여러 선택 요소 중 특정한 것들을 선별합니다. 선별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원본⊃복제’의 의미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원본을 재단해 의미의 다양성을 낳기도 합니다. 추종追從(좇을추:좇을종)과 이탈離脫(떠날리:벗을탈)이 자신의 경계면을 드러낸 후 한쪽을 품고 다른 쪽으로 기울어져 긴장이 완화된 상태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나이 즈음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들의 사진. 그것의 디지털 이미지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각각의 사진과 피사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는 저마다 다릅니다. 저마다의 시간들이 출력이라는 형태를 빌어 현시顯示(나타날현:보일시) 되어 함께합니다. 각기 다른 시간을 품은 돌림 노래가 동질감과 이질감으로 버무려져 소리 없는 소란스러움을 만들어 냅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돌림 노래는 각각 한 번의 완주 후 마무리되지만, 그들의 정교한 약속이 주는 혼란은 남습니다. 아버지의 시간이 흘러 아들의 시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시간 없이 아들의 시간이 존재하진 않습니다. 덩어리로 볼 것인지 각각으로 볼 것인지는 매번 질문을 통해 차곡차곡 쌓아야 할 요소이지, 단번에 규정할 요소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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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19세가 아버지의 19세에게 물어봅니다. “친밀함인지 거리감인지 모르겠는 이 모호함에 대해 어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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