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디지털이 안내하는 모네의 성당 안


   디지털 & 대면



관념 속의 아름다움을 대상에 덧씌워 ‘우아함’을 추구한 고전주의자들과 달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파악하려 한 사실주의자들의 그림은, 관찰을 근거한 묘사를 통해 상상의 세계에서 현재의 존재하는 무엇으로 形을 구출해 냈지만 그것은 모두가 납득할만한 고정된 무엇이어야 했다. 만져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시지각視知覺(볼시:알지:깨달을각)의 산물로서의 形을 집요하리만치 탐구한 모네는 대상을 미분(특정 시간)한 후 그것의 적분(같은 장소, 같은 소재의 반복적 그림)으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이라 믿어왔던 성당의 벽을 빛이 선사한 흐름 속에서 시시각각 자신을 달리하는 푹신한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사과의 단단함은 어찌할 것인가? 일루전illusion과 사물의 사이를 바라본 세잔은, 모네에 의해 제거된 形의 단단함을 시각적 관습이 아닌 관찰의 순간 발현하는 무엇으로 복원한다. 이제 빛에 의한 일루전과 시점에 의한 일루전이 결합하여 ‘있는 그대로의 形’이 캔버스에 자리한다. 이 위대한 성찰은 자신들이 구축한 성과를 단단한 바닥으로 만들어 ‘있는 그대로의 形’이란 것에 의문을 품은 이들의 기초가 된다. ‘있다’는 자신의 반대 면인 ‘없다’를 품고 열린 구도의 이야기로 가능성을 생산해 낸다. 부정할 ‘있는 그대로’가 생긴 모더니스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현再現(mimesis)을 거부한다. 재현의 거부 중 일부는 정신적인 것의 추구로 이어져 각각의 그룹이 추구하는 이상을 대변한 ‘선언’이 된다. 다양함... 하지만 그것은 다양을 추구한 결과물이 아닌 자신의 주장을 공고鞏固(묶을공:굳을고)히 하려 한 다수의 집단이 만들어낸 부산물이었다. 모더니스트들에게서 고전주의자가 추구한 이데아의 그림자를 발견한 현대미술은 자신에게 질문한다. ‘누가 성당에 들어가 제단에 놓인 사과를 먹어 본 것인가?’, ‘사과의 달콤함과 썩는 냄새는 제거의 대상인가?’ 흐물거림과 단단함을 포용한 현대의 미술은 부패를 인정하고 달콤함을 갈망하며 단단함에 가로막혔던 새로운 흐물거림의 일루전들을 매만지고 있는지 모른다.


본질과 허상, 흐물거림과 단단함, 내부와 외부의 이야기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거나 구분을 거부한 이들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 공유한다. 고전 철학의 마침표를 장식한 ‘Ghost in the Shell’은 디지털에 의한 사이버 세상으로 소환돼, 다시 ‘形’이란 것에 질문을 던진다.



흐물거리는 일루전들, 그곳에서 어떠한 ‘형’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의 재료가 고체固體이지 않기에 형 또한 고체이지 않다. 형을 고체로 이해하려는 습관은 형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인 경계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 된다. ‘1+1=2’인 경우는 고체일 때만 성립된다. 액체나 기체의 ‘1+1=1’이라 하면 틀린 답을 구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물을 ‘1’로 보려는 것이 모순이며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물을 특정한 그릇(경계면)에 담거나 그것을 고체로 가정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이와 같은 고전 철학의 이성을 기초로 한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을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은 흐름과 지속持續(가질지:이을속)이란 개념으로 비판한다.) 철학의 인식론적 관점을 동원해 현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바닷가의 기암절벽이 오랜 침식작용의 결과임을 알듯, 고정된 형으로 인식되는 고체 또한 최초의 형 그대로 영원할 수 없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영원과 불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자신 아닌 것을 자신의 몸 안으로 집어넣어 흐름을 거부하려는 부질없으므로 흐름을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형이 시간을 품으면 ‘무형無形의 정형定型(정할정:거푸집형)성’을 가진다. 이는 ‘지속’을 말하며 ‘불변’과 구분된다.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불변’이라면 매 순간 자신을 자신으로 발현發現(필발:나타날현)하는 것이 ‘지속’이다. ‘구름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시시각각 변하지만 매 순간 形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흐름 속에서의 정지 상태. 그것은 찰나刹那(ksana를 음역한 말, 지극히 짧은 시간)이며 구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구름처럼 ‘무형의 정형성’을 품는다. 단지 각자가 품은 시간의 흐름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품은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1890 ◀︎ / ▶︎ 1885


수많은 소리 중 단어를 선별하고 그것들의 조합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형이란 여러 가능성을 포함한 흐름 다발 중 원하는 이미지들을 선별하여 그것을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다수의 동의로 이름을 획득해 하나의 사물로 인식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고정된 형태인 캔버스는 대상을 자신 표면에 고착시키는 수단일 뿐인가? 그래서 모더니즘은 재현을 거부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선배들의 작업을 다시 한번 차분히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단단함을 추구한 세잔은 사물을 그 단단함 안에 가두려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물은 완성된 것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매 순간 발생하는 무엇으로 바라보았다. 세잔의 고민은 ‘감각과 이성’ 또는 ‘있는 그대로의 수용과 구성에 의한 객관화’ 사이의 긴장일 수 있다. 그는 인상파들의 주관성에 대항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다. 이것이 그가 추구한 색채와 형태에 의한 대상화 과정이며 그때 드러나는 형들의 집합을 통해, 그리는 이와 그려지는 사물 사이에서 충돌과 수용의 면이 드러난다. 캔버스는 그렇게 드러나는 면 중 하나이며 경계면의 작은 창이 된다.


오브제objet를 캔버스에 옮기는 혹은 캔버스를 떠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오브제와 관념적 오브제를 포함하여 화가의 2자二者 구도다. 캔버스는 3자三者 구도의 형성이 아닌 2자 구도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오브제와 화가 사이엔 ‘대면對面(대할대:낯면)’이 존재한다. ‘사이’는 ‘잠재성’의 영역이며 이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각으로 제한되지 않기에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다. 오브제의 잠재성, 화가의 잠재성, 캔버스의 잠재성, 캔버스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잠재성... 대면의 가치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 다다Dadaism를 경험한 현대 미술에서 캔버스와 오브제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거나 어쩌면 새로움의 출발점이 된다.


자신의 정원을 산책 중인 모네 ◀︎ / ▶︎ Claude Monet 「Water Lilies and the Japanese bridge,1897–99」 


이제 대면을 독립시켜 3자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식의 과정에서 대면은 반듯이 존재함으로, ‘대면’이라는 1자一者구도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을 품고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푹신함을, 단단함을, 달콤함을 경험했다.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식의 고정된 명제 만들기 놀이는 선배들의 유희로 남겨두어도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잠재성은 우리에게 충분한 오락거리를 생성하고 있다.


모네의 정원을 둘러보는 사람들


잠재성이 대면 되는 순간, 실존實存(열매실:있을존)이 자신을 드러낸다. 잠재성의 대면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실존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림에 실존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대면의 과정에서 생성된 새로운 잠재성을 포함할 뿐이다. 같은 그림을 보고 있어도 실존의 순간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발현된다. 실존이 어디에 머무는가 묻는다면 ‘그것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현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실존케 하는 것은 나를 대면케 하는 것이며, 그것은 나를 나로서 발현케 한다. 저 멀리 무언가 너머에 있던 이데아는 지금 내 앞에, 혹은 항상 내 주위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제한되거나 규정된 무엇이 아닌 발현될 무엇이며 나의 예측 저편에서 친절히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 손은 절대자가 준비해 놓은 것이 아닌 내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며, 그 마련의 과정은 고되지만 즐겁다.


Claude Monet 「Rouen Cathedral, Facade」 / sunset, 1892-1894 ◀︎ / 1, 1892-1894 ▲ / ▶︎ Morning effect, 1892-1894


복제가 무수히 이루어진다 해도 이제 원본은 재현 직전의 것이 된다. 모네의 ‘루앙성당’ 중 하나를 누군가 복제할 때 그 복제품의 원본은 ‘루앙의 노트르담 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Rouen’이 아닌 모네의 ‘루앙성당’인 것이다. 혹은 ‘모네의 루앙성당’의 복제품( ≒ 사진, 모니터 화면)을 보고 그린다면 그 복제품이 원본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시뮬라크르Simulacre(허상)라 규정하는 것 또한 원본 직전의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답형의 결과를 강요하는 ‘원본이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은, 내 앞의 무언가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이 품은 지난 것과 발현하는 앞으로의 것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자신 또는 타인과 공유하는 것으로 대치된다.


프랑스 루앙의 노트르담 성당 ◀︎ / 오르세미술관 ▲ / 아이폰 케이스 ►


대면은 항상 ‘질質(quality)’을 생산해 낸다. 따라서 재현의 과정에 대면이 존재하는 순간 재현된 결과물은 원본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질을 획득한 또 하나의 원본이 된다. 모든 것이 소멸로 향하는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며 끊임없이 질을 생산하는 생명의 역능力能을 이 시대의 복제가 재현하고 있다. ‘질’을 생성해 내는 놀이, 그것은 즐겁지만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을 질문받는다. 하지만 선택 이전에 선별은 없다. 선택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포용이다. 수많은 가능성 중 무언가를 구체화 시키는 것은 위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업적으로 역동하고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아선 안 될 일이다. 아기가 처음 ‘엄마’라고 하는 순간은 실로 대단한 일이지만, 부모라면 아이가 언어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면 겪을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공유한다고 자부하는 한국은 자신이 이해한 역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이의 역능을 막아서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경험에서 오는 지식, 그에 근거한 판단, 상상이 경험을 무시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경험으로 상상을 막을 근거 또한 없다. 경험의 리얼리티를 상상이 넘어설 수 없으나 경험에 가둔 현실은 되돌이표 안의 음표들처럼 그저 과거일 뿐이다.


실존은 마주침의 순간, 대면의 순간 발현된다.

언어는 대화의 순간 실존한다. 대화의 순간은 화석화된 텍스트가 읽히는 순간, 머릿속의 ‘기의記意(signified)’들이 ‘기표記表(signifier)’화 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회화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시대 캔버스≒갤러리를 떠나자고 혹은 지키자고 논하는 것은 선배들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사칭하는 것일 뿐이다. 회화가 소비 시대 ‘기호嗜好(즐길기:좋을호) 記號(기록할기:이름호)’의 놀이를 자신의 놀이화 하여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은 실존하는 동안이다. 그리는 이가 어떠한 개념을 떠올리는 순간, 그것이 캔버스에 옮겨지는 순간, 그 캔버스와 누군가가 대면하는 순간...

그리는 이의 생각이 올바른지 그 생각이 보는 이에게 올바로 전해지고 있는지 등의 가부可否(옳을가:아닐부)의 고민은 잠시 접어두자. 대화≒캔버스는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그 오해를 푸는 방법으로 대화보다 좋은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오해란 대화의 경계면 중 하나 일 뿐이다.



모네는 다작多作을 남긴 루앙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자신의 미학에 충실했음이 전해지는 일화이다. 하지만 당신은 성당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작동될 모든 것 -오성, 감각, 습관, 기호...- 이 궁금하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성당은 항상 만인에게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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