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디지털은 나의 가부(可否)로부터 자유롭다.


   디지털 & 대면



음원을 디지털 소스digital source로 구매하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이지만, 소리를 디지털로 저장하는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 진다 해도 그것이 나의 귀를 직접 울려주진 않는다. 뇌 기능의 기계화가 진화를 거듭해 소리의 인식을 고막에 의존하지 않는 시대가 머지않은 듯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디지털 소스로 저장된 코드code가 DAC(Digital-to-Analog Converter)를 거처 스피커를 울린 후에야 그것을 소리로 인식한다.
이는 그림도 예외가 아니며 디지털 코드로 저장된 그림은 반듯이 특정한 소재(media: 종이, 모니터…)에 구현 가능한 신호로 변환된 후 자신을 드러낸다(표상表象한다, presentation).


이처럼 디지털 코드는 자신을 현시顯示(나타날현:보일시)하기 위해 매개媒介(중매매:끼일개)를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영혼이 머물기 위해 육체가 필요하며 영혼이 떠나면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각과 매우 닮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육체와 하나의 정신이 쌍을 이루는 전통적 관념과는 달리, 디지털 코드는 자신을 담는 그릇을 넘나들며 무한 복제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아아 & 거울 ◀︎ / 백남준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and Hawaii, 1995-96」 ▲ / おしい まもる 「攻殼機動隊, 1995」 ►


‘Ghost in the Shell’ ... 오래되고 진부해져 마치 화석처럼 구석에 밀려있던 이 명제는 디지털이란 환경에서 다시 생명력을 부여받고 맹렬히 활동 중이다. 동명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ghost in the shell)’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그 관계를 설명하려 한 이원론二元論적 세계관을 ‘기계와 정보’로 치환置換(둘치:바꿀환)해 화려한 장면과 함께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극단적이고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하는 이와 그 안에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다는 이가 논쟁한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생명력은 과학과 철학의 위대한 성찰이 아니다. (영화감독이 왜 그것까지 해야 하겠는가! 해박한 지식은 박수 받을 일이지 강요 받을 일은 아니다.)

하나의 가설이 이루어낸 상상의 생명력은, 자기 아닌 또 다른 상상의 경계면과 접속해, 정지해 있던 무언가를 운동의 상태로 만들며 그것이 논리적이던, 비논리적이던, 아직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일루전들이 만들어지는 흐물거리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루전은 ‘생성’되는 것이지만 장은 ‘마련’해야 하며, 마련에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의 가치는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장을 마련한 자신을 대견해하며, 그곳에서 생성되는 일루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행동은 부질없다. 일루전을 품은 이야기는 이제 만든이의 것이 아니다. 생성된 일루전은 또 다른 경계면과 접속해 새로운 장을 만들며 자신을 복제해 나간다. 특별한 용도로 마련된 장에서 무엇이 발현될지 예상할 수 있으나 그 예상은 확률일 뿐 일루전은 매번 확률 이상을 준비해 예상을 넘어서는 즐거움을 남기며 운동한다.


Pierre Bourdieu (1930-2002) ◀︎ / 피에르 부르디외 「La Distintion(구별짓기), 1979」 ▲ / 2010년 대한민국 우측보행 캠페인 ►


일루전이 생산됨과 동시에 - 상품의 최초 기능으로서의 - 本근원본은 불분명해지나 매 순간 本은 자신의 모습을 발현한다.

상품(≒ 애니메이션, 음악, 미술...)의 일루전은 상품 스스로 혹은 사회적 코드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것을 인식(보고, 느끼고, 생각하고…)하는 이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여기서 속한다 함은 거대한 흐름 중 일부가 나와 접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걸 담아낸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접속의 과정 또한 오랜 기간 관념화되어온 규율과 그로 인해 생긴 나의 습관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구조와 개인의 긴장을 설명한다.)

따라서 특정 명칭으로 규정되어 있는 形형상형이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다기보다 특정한 접속으로 발현된 것이며, 자신과 타인이 그것을 인식하는 경계면에서 구성된다. 물질로서의 상품과 인식 주체로서의 나 사이에 일루전의 집합체로서의 형이 존재하는 것이다. 本은 그 셋의 조합에 따라 운동하면서 규정되고 해체된다.



‘일루전의 집합으로 形이 존재한다면, 일루전을 생산해내는 디지털 코드도 특정한 매개 없이 形으로 존재 가능하다.’라는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이 질문의 답은 시장이 풀어야 한다. 가부可否의 논의에 내가 답을 내려 함은, 시장이란 환경에 대한 미숙한 파악에서 파생되는 행동이다. 소비되는 순간 그것의 존재는 인정받고 가부의 논의는 종식된다. 가부로부터 자유로운 시장, 그에게 의문이 있다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가 질문하는 순간 나는 가부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것을 흡수해 외부가 없는 듯한 그의 영역에서 그가 만들어낸 것의 소비를 넘어, 나의 즐거움이 만들어낸 잉여剩餘(남을잉:남을여) 생산물에 그가 대가를 지불하는 시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의 선전 도구 중 엘리트에 속하는 디지털의 생명력vitality은 그에게 답변을 요구함에 있다. 디지털은 생명체로 구분되지 않는다. 허나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함께 걷자 한다. 친구가 된 디지털은 나의 가부로부터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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