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평준화된 나를 인식 하는 생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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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작품)이 일루전illusion과 리얼real을 동시에 품고 신화의 주인공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상품성 획득을 통한 시장의 동의가 필요하며, 상품성 획득을 위한 선행으로 희소성과 아우라를 품어야 한다면, ‘이미지 복제 시대, 동일 작품(≒상품)의 다수 생산이 가능한 시대에 어떻게 상품성(아우라, 희소성)을 획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앞서 ‘팝아트의 차용을 통한 기호성 배제의 변용變容.은 시장에 의해 ‘기호’ 획득을 통한 상품 되기의 변용 과정으로 변용되었으며, 이제 변용은 ‘~되기의 문제’가 된다.’는 다음과 같은 로직Logic을 설정했음을 상기reminding하자


‘어떻게 상품이 될 것인가?’는 ‘아우라의 획득’으로, ‘어떻게 판매를 이룰 것인가?’는 ‘희소성의 획득’으로, ‘어떻게 희소성을 이룰 것인가?’는 ‘시장이 인정하는 아이덴티티의 구축’으로, 즉, 이 논의의 최종은 ‘대량 생산 품속에 일반화된 존재를 어떻게 유일무이함을 획득한 존재로 이동할 것인가?’가 된다.
이제 ‘아우라와 희소성의 획득’ 문제는 ‘아이덴티티의 획득’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신화의 영역으로 진입한 현대의 시장에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전통적인 개념의 ‘本(근본본)’으로 이해한다면 이야기의 방향을 잃는다.
일루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시시각각 변하는 일루전들의 적분 또는 미분을 통해서 ‘本’이라는 것을 설명하려 한 경험주의자와 인상파 화가들의 노력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모네와 세잔을 거치며 흐물거림과 단단함이란 질문의 결과물도 충분히 경험했다. 또한 ‘本’이라 할 만한 것의 구현이나, ‘本’이라 말해 온 것을 전복한 결과물이 현대 시장의 시스템에 의해 재가공되어 상품으로 복귀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다.


Woody Allen 「Midnight in Paris, 2011」 中 오랑주리 미술관 ◀︎ / Paul Cézanne, 「Mont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Tree, circa 1887」 ►


시장이란 시스템은 소비라는 미덕에 힘입어 자신의 진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아이덴티티’도 그에 의해 가공될 것이라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시장의 결론은,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생명이라는 간단한 사실의 상기想起(생각상:일기)를 통해 진부한 듯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모든 생명체가 소멸로 향하는 노화를 품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무언가 끊임없이 생성해 내며 노화의 즐거움을 이해한다. 싱그럽던 꽃의 시듦은 애처롭지만 그 시듦까지가 꽃이며 그 과정을 통해 꽃은 씨앗을 만들어 낸다.



다양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유행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소비자를 평준화된 울타리 안으로 친절히 안내하는 시장의 시스템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됨을 염려해 자신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개인의 결단력을 응원하며, 다양한 기호들을 조합하고 그것의 선택권을 ‘나’에게 부여해 시스템에 의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 ‘나’의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시스템에 의해 가공-규정 되는 ‘나≒상품≒작품’ ; 규정됨을 불편해하거나, 규정됨을 요구하고 바라는 ‘나’ ; 탈주와 안주의 두 갈림길 ; 혹은 탈주조차도 먼 길을 돌아 시장으로 회귀 되는 시스템 ; 이 집요하도록 ‘나’를 뒤쫓아 자신이 정한 공론公論의 장으로 이끄는 시스템.


완벽한 도돌이표 ll: ♩♪ 나 ♬ ♩ 시장 ♪♬ :ll 를 소유한 듯 보이는 시장에게, 그 자신의 성공 요인이었던 일루전이 ‘그 도돌이표는 일루전이 없습니까?, 이제 그것이 당신이 규정한 ‘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생명에게는 그 어떤 시스템의 구조로도 예상할 수 없는 변종으로의 가능성이 내재內在되어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하기만 한 이야기인가?


그가 부여하는 ‘아이덴티티’에 대해 유연함을 취하는 것 ; 시장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뿌리 내림으로 그 안에서 시장이 아닌 자신을 살찌우는 것 ; 시장이 가꿔야 할 씨앗을 제공하는, 혹은 나의 씨앗을 시장이 경작하도록 그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 ; 돌연변이는 인간이 이루어낸 과학의 영역 이전에 자연의 현상이었다는 것 ; 그 자연이라는 영역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 ; … .


Spike Jonze 「Being John Malkovich, 1999」 ◀︎ / A와 B의 명도는 같다 ▲ / Andy Warhol 「Campbell's Soup Cans, 1962」 ►


기호들이 제거된 평준화된 나를 인식 한다는 것은 익숙함이 생경生梗(두 사람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만한 일이 생김)함으로 전환 되었음을 말한다. 중심이라 여겼던 지점에서 한발 물러서는 순간, 가장자리의 경계면에서 나와의 대면對面(대할대:낯면)은 시작된다. 상품으로 예술품의 시장 진입은 아이러니하게도, 경계면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 ‘나’와의 ‘대면’의 문제로 이동한다. 생경함이 주는 초현실의 시선이 땅에 발을 딛고, 생경함이 주는 리얼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선택이 고되지만 즐겁다는 것을 일깨운다. 시장이 가부可否와 진위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듯이, 그들의 가부 판단 기준에 ‘나’를 스스로 가둘 이유는 없다. 탈주와 안주의 갈림길에서 ‘나’의 선택은 비판의 대상일 수 있으나 금지의 대상일 수는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즐겁게 나를 밝히는 것이다.


이제 저곳there의 이야기에서 이곳here의 이야기도 함께할 때가 된 것이다.


내부에 포획된 현실과 내재적 비판은 구별된다. 외형의 일루전만이 아닌, 내부의 일루전을 함께 탐구하는 것. ‘바깥’만을 향해 있던 시선의 출발점을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혹은 ‘내부’만을 향해 있던 시선의 출발점을 ‘외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팝아트의 선물은 ‘대면’이라는, ‘나의 시선’을 출발시킨 것이다.


아우라의 권력을 경계한다는 텍스트로 자신의 상품을 포장해 오히려 그것의 아우라를 강화시키고, 미학의 주석들을 짜집기하여 ‘나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을 혼재시키며, 예술의 진보를 자처하는 ‘엘리트주의Elitism’는, 자신들의 소개로 ‘POP Art’보다 ‘Classic’ 혹은 ‘Loyal’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산자 혹은 판매자가 그들의 상품에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자유다. 허나 관람자의 판단에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할 권리는 부여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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