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신화의 세계로… ‘illusion 일루전으로서의 현실 real’


   디지털 & 대면



상품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진다는 이유로 전통적인 리얼real의 규정을 충족한다. 그러나 적절한 유통 시기가 지나거나, 반대로 유통에 적당한 시간을 머금지 못하면, 수로 환산된 상품의 가치는 급격히 감소하며 시장에서의 존재성은 의심받게 된다.


‘시장에선 ‘역량’을 발휘하는 것보다 동의를 구하고 교제의 허락 여부가 중요하다. 선악, 진위의 문제는 동의를 얻느냐의 문제로 대체된다.’고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지적하며, 소비의 사회를 옳고 그름, 진위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신화神話의 구조로 규정한다.


Jean Baudrillard (1929-2007) ◀︎ / 장 보드리야르 「La Société de consommation(소비의 사회), 1970」 ▲ / Galerie LaFayette Paris ▶︎


현대의 소비 사회가 신화의 구조라면, 소비가 신화의 범주로 진입하면서 획득한 것은 진위의 초월과 함께, 전통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저편에 있던 것, 절대자의 그것인 숭고를 획득한 것이다. 허나 그 숭고의 이미지는 과거(칸트)의 것과는 구별되는데, 이제 그것은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기대감에 의한 현실과의 뒤섞임으로 존재한다.

손에 들고 있는 고급 핸드백이나 그 가방 안 스포츠카 열쇠처럼 나의 구매 능력에 따라 획득할 수 있는, 저편에 있으나 이곳에서 존재 가능한 무엇이 된 것이다.


Claes Oldenburg (1929- ) ◀︎ / Jasper Johns (1939- ) ▲ / John Cage (1912-1992) ▶︎


숭고의 추상성을 거부한 팝은 현실의 소재를 재현했다. - 올덴버그는 상점의 '진열품'을, 제스퍼 존슨은 ‘깃발’을, 케이지는 ‘음 자체’를...- 하지만 현실의 사물을 사물 자체만으로 다루어 그것의 기호성 배제를 경험케 한 일련의 작업들이, 우리가 늘 보아오던 공간이 아닌 캔버스 혹은 미술관이라는 장소성을 획득함으로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이미지와는 다른 초현실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는 신화의 사물을 기호와 독립시켜 현실화시키지만, 그 현실은 신화의 세계와 뒤엉켜 박스는 다시 신화의 한 부분으로 흡수된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자에게, 미학적 주석이 부여된 박스는 순간 기호가 제거된 사물로써 마주침이라는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나 또 다른 마주침을 선사하는 미술품들에 감탄하는 관람객들의 멀어지는 환호와 함께 신화의 소재로 미술관 한켠으로 복귀한다.

칸트의 자연이 주는 숭고를, 그린버그의 색면추상이 주는 숭고를, 시장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서 브릴로 박스는 재현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추상을 품고 저편에 존재하던 숭고가 육신을 빌어 세상을 구원한 예수처럼, 형을 품고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illusion 일루전으로서의 현실 real


실체實體(열매실:몸체,substance)라 부르지 않으나 현실에 실재實在(열매실:있을재,reality)하는 이미지, 기호 등(≒ illusion)을 원본 삼아, 원본의 상품으로서의 질을 넘어서는 상품(≒ real)을 만든다. 여기에서 복제는 질이 떨어지거나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상품적 질을 높이고 아우라를 덧씌우는 작업을 통해 가치를 인정받는 상품(≒ 이미지, 기호 ≒ illusion)이 된다.

일루전들의 시뮬레이션(simulation)을 통해 시장이 동의하는 상품(real & illusion)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신화의 시대, 리얼(real)은 이렇게 우리 앞에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지의 놀이, 기호의 놀이, 텍스트의 놀이, 복제의 놀이는 시장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투명한 존재인 상품이 되기 위한 놀이가 되어 또 다른 놀이를 준비하고 있다.


상품을 제작하는 행위, 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노동의 시작점에서 ‘리얼리티Reality’의 단계이며, 그것은 생산됨과 동시에 기호화되어 시장이라는 신화 속에 진입한다. 신화 속의 상품≒작품은 수많은 일루전들을 품고, 눈앞에 현존하는 전과는 다른 ‘리얼’을 획득해 지은이가 없는 신화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살 찌우고 있다.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