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로 만든 상자, ‘쇼윈도우 (show window)’

쇼윈도우show window는 상점의 안과 밖의 경계면에서,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훤히 공개한 듯 자신을 치장하고 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그 경계면은 내부의 연장으로 상점 밖의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입구에 불과합니다. 그곳에 진열된 제품은 소비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위해 자신을 치장하고 판매에 불필요하다면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은폐함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 . . 이러한 쇼윈도우의 특징은, 오늘날 자신을 무한한 무언가를 향한 개방된 입구로 소개하는 것들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포털사이트(Naver, Daum...)입니다. 정보의 바다로 안내한다는 그들의 메인 화면은 이미 다양한 광고의 집합체임을 거부하지 않는 듯 보이며, 그러함은 상단에 비치된 기사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정보를 품은 듯 보이지만, 대부분 광고를 광고하는 놀이를 통해 소비를 위한 입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이는 광고 놀이에 재미를 붙인 포털사이트의 메인 디자인을 통해 배가되고, 지속적으로 연구되며, 광고의 바다로 소비자를 친절히 안내합니다. 정보 풍요의 시대, 그리고 소비 자체를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 . .





제품이 모두 쇼윈도우에 진열되지 않듯, 쇼윈도우에 진열된다 해서 모두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오늘날 이곳 한국 갤러리의 그림들이 대부분 거래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갤러리는 상점과 다르게 판매에만 목적 두지 않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 간다 자부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갤러리가 문화의 공간으로 대중과의 소통이 부족할 때, 그들은 스스로 자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수익구조와 대중과는 크게 결부된 바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덧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미술 시장이 잠잠해지고, 거리의 갤러리들은 커피를 팔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제 상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이곳의 갤러리는 쇼윈도우가 되어 그림 진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살롱Salon의 화려함을 벗어 던진 화이트큐브White Cube(시각예술이 행해지는 공간, 갤러리 등을 상징)는 자신이 획득한 장소성을 이용해, 대량 생산품도 예술 작품으로 둔갑시켜 자본의 시대에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마련했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끌어모아 관람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해야 함을 그들은 스스로 숙제로 만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생산자들은 잘 그리거나 잘 만들어야 함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고, ‘누가 쓰레기를 예술로 팔아먹는 재주를 부릴 수 있는가?’란 주제로 한동안 판매처⊃화이트 큐브와 대립한 듯 공생해 왔습니다. 한쪽에서 진행한 포섭包攝(들일포:당길섭)에 대하여 반대편에서 경계하며 탈주脫走(벗을탈:달아날주) 하던 이가, 나에게 즐거움이 된다면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때론 전면에서, 때론 지원자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동시다발적 시점(전시 공간을 관객이 이동하면서 스스로 시점을 선택하며 관람하는 특성)이 가능한 화이트 큐브에서 자신의 시점을 강조하고 싶은 작가는 적절한 짝이 되어 미술 시장의 주체로 부족함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시각예술이 작품이라는 물질화된 구조를 통해 쉽게 상품으로 전환 되는 것과는 달리, 공연예술은 형태상 상품(ex:관람료, 음반, 저작권...)화에 제한이 따릅니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공연예술은 시각예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본에 대해 저항의 의미를 품고, 퍼포먼스performance등의 형태로 미술에 반영되어 왔습니다. 어느덧 큐브는 행하는 이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퍼포먼스라는 형식을 넘어, 하얀 자신의 공간에 검은색 박스Black Box(공연예술이 행해지는 공간, 콘서트홀 등을 상징)의 기능을 더해 공연과 전시의 모호한 경계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형태상 다른 면面(겉면)과의 접속이 용이한 큐브cube는 그로 인해 확장의 가능성을 품습니다.

자본과 지나칠 정도로 밀접해진 화이트큐브와 블랙박스의 만남은 공연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의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본화되어가는, 이제 자본에게 거의 내줄 것이 없어 보이는 화이트 큐브에게 걸 수 있는 희망은 이러한 접속과 확장에 의해 그들 스스로 행하는 내재적비판內在的批判(어떤 학설이나 사상에 있어서 그 전제가 되는 것을 일단 인정한 뒤에 그 내부의 자세한 것을 비판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진술Constative해왔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수행Performativity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한가지의 수행遂行(이룰수:갈행)은 연마硏磨(갈연:갈마)를 의미합니다. 허나 다양한 이의 다양한 수행은 그것의 적분으로 다양한 의미를 구축하며, 그러한 구축을 통해 해체解體(풀다해:모양체)를 상정上程(회의에 부쳐지다)합니다. 화이트큐브가 자신의 존속存續(있을존:이을속)을 위해 선택한 것 중 하나인 다양함이란 통로는, 어쩌면 해체를 위한 작은 열쇠 구멍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소비자는 화이트큐브라는 정교한 자물쇠와 해체라는 정교한 열쇠가 만들어갈 이야기를 제공 받을 차례인 겁니다.





이곳의 갤러리들도 자신을 화이트큐브라 부릅니다. 외형은 화이트큐브로 더할 나위 없습니다. 허나 성격은 글라스박스Glass Box에 가깝습니다. 사방이 유리인 쇼윈도우가 되어 진열품들에게 잘 그릴 것을, 잘 만들 것을, 정보를 모아올 것을 요구하기에 바쁘며, 접속을 통해 유리막 너머의 박스보다 좀 더 나아 보이기 위한 치장으로 바쁩니다.

금융자본주의와 협력한 시장은 끊임없이 상품을, 개인이 그것을 상품이라 인식하기 이전의 단계에서 기획하고 판매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놀이에 화이트큐브 또한 적극 협력 중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판매자로서 시장에게 당당한 권리를 요구함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허나 글라스박스는 자신들도 놀이에 끼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미술 시장은 자본에 포획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작가들 또한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보다, 소비자가 멀리서 자신을 인정하고 구경하기만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쇼윈도우 밖의 풍경을 보며, 제자리에 서서 자신은 탈주 중이라 착각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한국의 소비자는 미술보다 그나마 소통하고 있는 디자인에 비용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갤러리에서 디자인을 전시하기 요구하고 갤러리들은 열심히 자신의 쇼윈도우에 디자인을 진열하기 바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팝아트는 레디메이드ready-made(대량생산품)의 차용과 변용이라기보다, 자본에 포섭된 자신의 반영에 가깝습니다. ‘미술이란?’의 고민 보다, ‘미술이야!’란 다짐의 모습인 겁니다.

새로운 수요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허나 그것이 대안 없으므로 인한 차선의 선택일 경우, 왜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경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의 갤러리가 글라스박스Glass Box라면 안이 꽉 막힌 화이트큐브White Cube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용이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포획된 자신을 만나는 순간, 탈주는 고개를 내밀고 논란이 넘실대는 예술의 바다로 안내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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