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이는 것과 만나는 것, 그리고 남겨진 그림


   시선 그리고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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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vue de Bellevue, 1885」


세잔, 그리고 「생트 빅트와르 산 Montagne Sainte-Victoire」


보고, 이야기하고, 떠올리고 화폭에 담은 산.
하루 하루 다르게, 혹은 너무도 동일해, 자신이 보고 ; 느끼고 ; 떠올린 ; 것을 모두 동일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산.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vue depuis Gardanne, 1886-1890」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1897-1898」

Paul Cézanne 「Route devant la Montagne Sainte-Victoire, 1898-1902」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1902-1904」

Paul Cézanne 「Montagne Sainte-Victoire au-dessus de la route du Tholonet, 1904」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vue du bosquet du Château Noir, 1904」


Paul Cézanne으로 이어진 「Montagne Sainte-Victoire」를, 보고 ; 느끼고 ; 떠올리고 ; 상상하며 ; 그의 「Montagne Sainte-Victoire」와 나의 「생트 빅트와르 산」이 하나의 산임을 의심치 않기 위해 수많은 지각 장치들이 작동해야 함을 비로소 인지한다. 무언가 깨달은 듯 우쭐한 나에게 세잔의 「산」은 자신을 내비치는 하나의 「창」이 되어, 나에게 단단함과 흐물거림에 대해 질문한다. 「창」이 던진 질문에 서슴없이 조합되고 정렬되는 조악한 현학적인 답변들이 나의 입을 떠나 소리로 전환되기 전, 이제 소리가 되어 흩어질 단어와 문장의 이미지들이 자신들에겐 형태가 있는지 질문한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컵이 가득 차면 더 이상 컵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문장으로만 기억한 채, 일상 속의 수많은 사물을 단어에 가두고, 형태에 가두고, 색에 가두고, 돈으로 환산된 가치에 가두어, 바라보고; 인지하고; 떠올리는; 것에 익숙해진 후, 그러한 익숙함을 능숙함으로 포장하고 안도한다.

어느덧 무뎌짐이 되어버린 능숙함은, 매 순간 펼쳐지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으로 재단하여 반듯해진 나의 조그만 세상을 세계와 동일시하는 신속함을 행하며, 그렇게 재단을 가하는 이유의 치밀함을 만들어 세계와 동일해진 나의 세상을 다른이의 세상으로부터 방어한다. 그러나 흐름을 외면한 채 컵에 담긴 물만을 바라보는 나의 교만을 위로하듯, 내 주위를 맴도는 바람은 자신을 방어하던 동일함과 공명共鳴(resonance)하며 수면을 흔들고, 내가 이제껏 알아왔던 수많은 사물의 이름보다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하나인 듯 하나임을 포기한 듯 흐르고 흩어진다.



Pau_Cézanne-La_Montagne_Sainte_Victoire-1902-1906
Paul Cézanne 「La Montagne Sainte-Victoire, 1902-1906」    



모네가 정원의 「수련」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세잔이 생트 빅트와르 「산」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그들은 왜 그토록 하나의 단어로 규정 가능한 것을, 그린다는 행위와 함께하는 것으로 반복했는가?


그들의 그림을 잘 알고 있다는 이들의 글을 통해 그들이 행한 반복의 의미를 접할 수 있다. 이제 그 의미를 접했다면; 알게 되었다면; 또는 익히 알고 있었다면; 그들의 그림을 그만 볼 것인가? 아니면 이제 그 그림들은 익히 아는 것으로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심시키기 위해, 혹은 자신의 앎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존속되어야 하는 무엇인가?
만약 그들의 그림을 기억하는 이유가 위에 나열된 것들 중 하나라면, 나는 처음 나에게 다가온 그림의 생경함을 잊은 지 오래 이거나, 지금의 시선은 외면한 채, 누군가 혹은 내가 정해놓은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 위에 그림의 이미지를 포개어 놓은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부터 나의 시선에 무뎌진 것인가? 왜 지금의 이야기를 포기한 채, 과거의 이야기만을 현재화하는가?


모네의 정원안 「수련」의 이미지는 캔버스와 수련에 쏟아지는 빛 사이를 그의 시선과 경주하듯 왕복한다. 세잔을 관통한 「산」의 이미지는 다시 산을 관통해 나를 관통하기 직전까지 달려온다. 그렇게 그들의 시선視線(one's eyes, one's gaze)은 ; 시점視點(point of view)이 되어 ; 누군가에게 고정되고 각인刻印(carve a seal)되기 전까지 ; 끊임없이 달린다. 그들의 반복≒연작은 과거와 지금을 오가며, 눈 앞의 그림 속 풍경을 현재의 것으로 만든다.

시선의 반복으로 시작된 시점의 달리기는 시각視角(perspective)으로 고정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궤적을 만들며 자신이 대면하거나 관통하는 것들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 낸다. 수련의 ; 산의 ; 그림의 ; 두터움은 이야기는, 사물 자체보다 그 간격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진 시선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에게서 반복된 그린다는 행위… 그리고 남겨진 그림.

나는 왜 그들의 그림을 또다시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모네에게서 그린다는 행위는 하나의 대상에 반복되며 그것의 일루전illusion을 코드Code화 시킨다.
정원의 수련(A)은 눈앞의 수련으로 재단되어, 코드(A′)로 변형되고, 캔버스에 그림으로 고정된다. 그림으로 고정된 코드(A″)는 조금씩 때론 급격히 자신을 변형( A¹, A²…Aⁿ)하며, 또 다른 캔버스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반복되는 코드의 결과물들을 보며, 코드가 혹은 모네가 특정한 지향점을 추구했는지, 혹은 특정한 지향점을 거부했는지를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것은 나의 자유지만, 나의 결론에 생성되어진, 그리고 만들어질 코드가 동의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코드의 동의로 부터 자유로워진 결론들에게 세잔의 그린다는 행위≒코드化는, 고정된 그림이라는 결과물에서 마침표 못지 안은 단단한 쉼표의 일루젼을 만들어 내며, 그림을 보는 나에게 쉼표 다음 이야기의 화자話者가 될것을 제안한다. 감상은 ; 해석은 ; 그 자체로 하나의 결과≒나의 세상일 뿐 결론이 되기에 너무도 소박하다. 그것이 결론으로 용인되는 것은 그 결론이 또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고 확장되어짐을 금지하지 않는 한에서다.

모네의 수련 코드(A′, A″… A¹, A²…Aⁿ)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통해 텍스트로 코드(A-1′…A-1ⁿ)화 되고, 그 코드는 세잔의 산을 다시 바라보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텍스트가 된 코드는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그림(B)이 되고, 음악(C)이 되고, 글(D)이 된다.




대상과 그것의 일루전, 그리고 코드의 이야기가 때론 모든것은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매 순간 발현 되는 시선은 과거를 탐닉하는 한점point의 이야기를 다시 현재 지금의 이야기로 이끌고 점을 확대해 수많은 점이 공존하는 커다란 원circle을 만든다.


Abstraction

시선은 대상을 재단하고 마름질하여 시각이 되지만, 점과 원을 관통한 시각들의 적분은 켜켜이 쌓여 거대한 덩어리로, 그러나 나를 압도하거나 자신의 거대함을 가늠할 것을 강요하지 않은 채, 내 안에 충분히 담겨 실재實在한다. 허나 실재하는 대상은 지금의 충분함을 반영한 것일 뿐, 매번 그 충분을 달리하며 충분함과 완벽함을 구분한다. 대상의 모든 얼굴을 담아낼 수 없는 나에게 대상은 추상이 되어 실재한다. 때론 한 번에 설명하기 어려운 흐릿한 얼굴로, 때론 하나의 단어로 설명 가능한 선명한 얼굴로 나에게 실재하지만, 그 모두는 켜켜이 쌓여 추상이 된다.
세잔은 긴 호흡으로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다양한 얼굴을 가진 「Montagne Sainte-Victoire」와 대면했을 것이다. 그것은 빛으로만 설명할 수도 없으며, 구조만으로도 설명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시각화되는 것을 이해한 듯 창이 된 캔버스를 통해 산을 바라본다. 그릴 것을 정한 후 부합하지 않는 상을 지워 내는 것이 아닌, 담겨진 충분함으로 상을 추구하며 추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근원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이 그려낸 무언가가 오로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어쩌면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신을 만들고 그를 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한 집착은 자신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추상으로 포장하고 모든 것을 담아 낼듯 무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라는 것은 비워 있음 자체이기 보다 스스로를 비워내는 에너지 일지도 모른다.


·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것과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실재를 ; 실체를 ; 추상을 ; 무를 ; 이해할 것인지 이루어 낼 것인지로 논쟁하는 것은 그것의 치밀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에게 소모적이다. 선배들의 치열한 논쟁의 결과를 교묘하게 차용하는 것으로 현대의 미술은 자신이 누려야 할 풍요 이상을 누려 왔다. 풍요의 유지를 위해 자본과 권력에 결탁한 모습이 미술의 역사 속에서 새롭지만은 않지만, 지금처럼 자본과 권력에 의존적인 시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컵의 물을 마시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내가 들고 있는 것은 컵이라 항변하고 있는가?

자신만의 시선을 포기한 미술은 더 이상 미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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